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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플렘와치] 독 04.


04.



심연A-byssos은 그리스어로 '바닥없음'이라는 뜻으로, 아오리스트aoriste가 뜻하는 무한과 같다. 시時의 무한. 더 구체적으로는 대양의 가장 깊은 곳, 태양 빛이 더 이상 닿지 않는 곳부터를 심연이라 부른다. - 파스칼 키냐르,『심연들』

사람들은 어떤 무시무시한 심연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곳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대부분의 심연은 실패라던가, 이별이라던가, 무력감 같은 것일 터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심연이었다. 내 자신이 빛이 들어올 수 없는 저 밑바닥이었다.



상담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반기는 것은 걱정이 줄줄 흘러내리는 엄마의 얼굴이었다.



“상담선생님한테 전화 왔어. 왜 그래, 재걸아. 무슨 일 있었니? 엄마한테 말해봐.”

“..쉬고 싶어요.”

“재걸아. 문제가 뭔지 알아야 나아지지..!”

“저 좀 혼자 있게 해주세요!”



발작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눈이 커다래지며 엄마는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재걸은 지긋지긋했다. 이 타이밍에 아빠가 재걸에게 한 소리를 해야 하는 게 맞았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빠는 야근을 하느라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인 듯 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엄마를 그대로 지나치고 재걸은 방문을 굳게 닫으며 가방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교복을 벗지도 않고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러나 자꾸만 떠올랐다. 끔찍스런 목소리, 숨만 쉬어도 목소리가 울리던 그 장소.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문득 병원에서 받아온 약이 생각났다. 재걸은 그대로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주워들었다.

하얀 색의 조그만 알약들이 데굴데굴 약통 안을 굴러다녔다. 재걸은 그 중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30분도 되지 않아 잠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수면제의 힘을 빌려 도피했지만 한번 발작을 일으킨 재걸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있었다. 엄마는 학교에 가는 것을 말렸다. 그러나 재걸은 기어코 학교에 갈 거라고 오기를 부렸다. 재걸 본인도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연약해져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우산이라도 가져가, 재걸아.”

“그냥 갈게요.”

“오늘 비 온댔어.”

“엄마.”

“응.”

“나 괜찮으니까 학교 갔다 올게요.”



엄마는 더 이상 재걸을 말리지 못했다. 엄마의 손에 여전히 들려있던 우산이 눈에 걸렸지만 재걸은 곧 잊어버렸다.



*



점심시간 전 쉬는 시간에 찬용은 호종의 반에 찾아와 호종에게 말을 걸었다.



“밥 먹고 축구 한 판 하자.”

“누구 네랑?”

“그냥 운동장에 있는 놈들끼리?”



호종은 흔쾌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급식과 축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찬용에게 호종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야.”

“왜.”

“너네 반 야자 다 하지?”

“또 뭔 개소리야.”

“아씨,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 학교에 야자 안 하는 놈도 있냐?”

“...우리 반엔 있더라.”

“뭐?! 와.. 쩌네. 어떻게 야자를 안 해?”

“담임이 집안사정이래.”

“우리 학교에서 야자를 뺄 수 있는 집안사정이 어디 있냐.”

“그걸 내가 아냐.”

“누군데?”



호종은 찬용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재걸은 반에 혼자 존재하는 듯이 고고하게 엎드려 있었다.



“쟤.”

“누구. 엎드려 있는 애?”

“어.”

“개쩐다.”



찬용은 순수하게 감탄한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내 수업 종이 울리자 찬용은 호종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호종은 모범생답게 미리 예습해둔 교과서를 폈다. 그러나 찬용이 대체 무슨 집안사정이기에 이 학교에서 야자를 뺄 수 있냐고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걸은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늘 혼자였다. 간혹 재걸의 외모를 보고 호기심에 말을 붙이는 여자애들이 몇 명 있었지만 곧 재걸의 망부석 같은 태도에 자진해서 떨어져나갔다. 그래서 여전히 재걸은 혼자였다. 때문에 점심시간에 밥을 같이 먹을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늘 조용히 급식실에 가서 조용히 밥을 먹고 조용히 식판과 수저를 정리하고 있는 듯 없는 듯 교실에 돌아왔다. 오늘 점심 메뉴엔 딸기가 있었다.



“딸기 안 주셔도 돼요.”



재걸의 말에 배식을 하는 학생의 손이 멈췄다. 재걸은 식판을 정리하는 곳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바로 옆엔 같은 학년의 다른 반 아이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반쯤 먹었을까, 옆에 앉았던 아이가 딸기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아오, 더럽게 뭐하냐?”

“덜 익은 거잖아. 안 먹을 거야.”

“야, 안 먹을 거면 날 주던가. 왜 뭉개냐고.”



그 애는 재미있다는 듯이 킬킬대며 웃었다. 숟가락에 짓물러진 딸기는 새빨간 즙을 흘리며 뭉개져 있었다. 그 때문에 재걸이 받지 않으려던 딸기의 시큼한 향이 코를 찔렀다.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재걸은 먹던 밥을 급하게 국그릇에 털어 넣고 식판을 버리고 화장실로 내달렸다. 얼마 먹지도 않은 밥이 위장을 역류해 식도로 곧장 올라올 것만 같았다.

호종은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앞 테이블에서 일어나 입을 막고 뛰쳐나가는 재걸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야.”

“뭐.”

“..나 먼저 이빨 닦고 운동장에 가 있는다.”



호종은 빠르게 식판을 정리하고 재걸을 쫓았다. 재걸은 제일 가까운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얼굴을 박고 구역질을 했다. 울컥울컥, 아직 채 소화도 안 된 음식물들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계속 숙이고 구토를 했더니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게 느껴졌다. 화장실을 드나드는 발소리도 여럿 들렸다.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토하고 싶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안 됐다. 재걸은 구토가 다 끝나고도 숨을 몰아쉬며 한참동안을 화장실 칸에서 나오지 않았다. 호종의 두 발도 재걸이 있는 화장실 칸 앞을 한참동안 떠나지 못했다.



“야, 시발.”

“왜 욕하고 그래 새끼야.”

“내가 욕 안 하게 생겼냐. 볼이 왔으면 차야지 뭐하고 있는 거야, 이호종.”



볼? 금세 낡은 축구공이 호종의 발 근처에 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호종은 바보처럼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아? 연주 생각하냐?”

“아니거든.”

“그럼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싱거운 새끼.”



찬용은 다시 공을 향해 뛰어갔다. 평소의 호종이었다면 찬용과 함께 달려갔겠지만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까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는 재걸의 모습만 떠올랐다. 딸기를 으깨던 아이의 무리는 소란스러웠다. 그 덕분에 그 애들의 목소리가 호종이 앉아있는 테이블까지 전해졌다. 화장실 두 번째 칸으로 달려간 직후에 재걸은 입을 틀어막고 구토를 했다. 재걸의 식판엔 딸기가 없었다. 호종의 식판도 마찬가지였다. 호종은 딸기를 싫어했다. 재걸도 저와 똑같아보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호종의 미간은 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 미친.”

“야 비 온다!!!”

“나 우산 빌려줄 사람! 오늘 안 가져왔어. 어떡함.”



7월 중순으로 접어드니 여름비가 잦은 빈도로 내리곤 했다.



“.....”



엄마가 아침에 챙겨주던 우산을 받을 걸 그랬나. 재걸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정류장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비는 내리고, 우산은 없었다. 따라서 정류장까지 꼬박 비를 맞으며 걸어가야 할 듯싶었다. 쏟아 내리는 비에 우산이 있는 아이들은 재빨리 신발을 챙겨 신고 교문을 나섰다. 점심 급식 후 보충수업만 있는 토요일이었다. 정류장까지 우산을 같이 쓰고 갈 아이들은 많았지만 재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학교는 빠르게 텅 비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텅 빈 조용한 감옥 같았다. 재걸은 계단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집에 가야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구 앞의 물웅덩이에 다른 그림자가 어렸다. 그 그림자는 주저하며 재걸의 어깨를 톡, 쳤다. 재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이호종이었다.



“우산, 없어?”

재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 타.”

“나도 그래.”

“거기까지 우산 같이 쓰고 갈래..?”



재걸은 호종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재걸은 심히 호종이 껄끄러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차라리 비를 다 맞고 감기에 걸렸다며 학교를 빠질까?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담임은 그저 집안 사정이라고 하면 알아서 이해해 줄 것이다. 그러나 재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고 도망을 칠 순 없었다. 오늘 자신은 이미 한 번 도망을 쳤다.



“......”



좁은 우산 아래 남자 둘이 있으려니 자꾸만 어깨가 부딪혔다. 간간이 호종의 어깨가 닿는 자신의 어깨가 불에 덴 듯이 쓰라렸다. 재걸은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고 호종은 말을 걸려다가도 재걸의 무표정을 보고 금세 입을 다물곤 했다. 갑갑하고 위태로운 침묵을 먼저 깬 건 호종이었다.



“있잖아.”



재걸은 호종을 보았다. 호종이 보는 재걸의 짙은 갈색 눈동자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호종은 재걸의 무표정이 답답했고 그걸 깨고 싶었다.



“내 이름 알아?”



재걸은 별 걸 다 묻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아.”

“모르는 줄 알고..”

“명찰에 써 있잖아.”

“아, 그렇지 참..”



호종은 머쓱해졌다. 호종의 표정을 보고 재걸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말을 덧붙였다.



“그 전부터 알고 있었어. 너 반장이잖아.”



그 말을 끝으로 재걸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부터 굳게 닫혀있는 것 같이. 호종은 이상하게도 예전부터 재걸의 꾹 닫힌 입술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더불어 자신이 그 입을 열려고 애를 쓴 것도 같은 착각도 함께였다.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류장에 도착하고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재걸이 타고 다니는 버스가 도착했다. 재걸은 그제야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우산 씌워줘서 고마워.”

“응.”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응, 이라고만 말했다. 호종은 재걸을 보았다. 재걸이 버스에 올라타고 카드를 찍는 것과 이어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까지 보았다. 재걸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다. 찬용이 말하길 호종은 자신과 친밀하지 않으면 괜한 친절이나 배려를 베풀지 않는 무정한 놈이라고 그랬다. 호종도 그 의견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의 부모였고 그런 성격의 호종이었다. 찬용의 말을 더 빌리면 호종은 충동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공부도 계획을 짜서 하고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어떤 걸 살지 메모를 해가는 호종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충동적으로 뛰쳐나가는 재걸을 따라 화장실 칸 앞에 있었고 괜한 친절을 베풀어서 우산까지 씌워줬다. 확실히 이상했다. 찬용에게 말한다면 오늘 뭐 이상한 약 했냐고 웃을 것이었다. 호종은 우후죽순으로 솟아나는 생각을 덮었다. 그냥 오늘은 토요일이라서 들떴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호종이 타고 다니던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에 올라타며 호종은 재걸에 대한 생각을 지우개로 지우듯 지워버렸다.




5개월 만에 쓰다니ㅜㅜ 연중 아니에요 이거ㅠㅠ